그림책의 그림은 순수회화
순수회화
그림책의 그림은 순수 회화와 구별해서 일러스트레이션이라
고 한다. 일러스트레이션(illustration)은 illustrate 라는 동사에
서 나온 말로,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라는 뜻이다. 그림책에
서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림책이 전하는 이야기를 설명해 준다.
오랫동안 그림책은 글자를 터득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어른이
읽어 주는 책이었고, 일러스트레이션은 책을 장식하는 요소로
사용되어 왔다. 도구였던 일러스트레이션이 오늘날처럼 주도적
인 역할을 하면서 그림책이 독자적인 장르로 크게 발전하기 시
작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. 오늘날 그림책 속에 담긴
일러스트레이션은 점점 회화적인 요소가 강해질 뿐만 아니라,
이야기를 설명한다는 목적 때문에 예술적 의의를 인정받지 못
했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. 좋은 일러스트레이션일수록 이야
기가 풍부하다. 한 권의 그림책 속에 어우러지는 일러스트레이
션은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든다.
좋은 그림책이란 어떤 것인가? 회화의 공간성과 영화의 시간
성이 간결한 언어와 입체적으로 만나서 풍부한 이미지를 주는
그림책이다. 글 속에 생략되어 있는 묘사와 서술을 세심하게
이행하고 있는 그림을 엮은 책이다. 그려져 있는 것과 그려져
있지 않은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독자의 능동적인
참여를 기다리는 그림책 속에는 글과 그림의 조합 방식에 대한
면밀한 고려가 숨어 있다.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
다란 선으로 표현하여 어딘지 소극적이고 더듬거릴 것 같아 보
이는 그림, 유창한 드로잉으로 힘 있게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
을 주는 그림, 사인펜으로 북북 그어 놓은 선들 때문에 꼭 망
친 것 같아서 인물의 절망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그림, 하
얀 바탕에 목탄을 문질러서 아련한 느낌을 주는 눈 쌓인 그림
들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다. 그림 자체가 보는 사람
에게 전하는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이다.
그림의 배경들이 거의 흰색이거나 흰색에 엷은 색이 들어 있
고, 물체를 표현하는 선들이 진하거나 날렵하면서도 많이 끊겨
있는 그림책도 있다. 그 끊겨진 선들마저 지워지는 곳에 빛이
있다. 그 빛은 그림 하나하나를 오로라처럼 둘러싸고 살아 있
게 만든다. 이렇게 말이 줄어들어 생긴 빈 자리에 상상력과
사유가 깃든다. 이는 건축 설계시 형태, 장식, 공간과 같은 요
소들 가운데 공간을 다양하게 변용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.
좋은 그림책은 완성되어 있는 글에 그림을 그려 넣은 책이
아니라 글과 그림이 함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책이다. 존
재하는 물감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색이 만들어지고, 선과
선, 색과 색, 혹은 선과 색이 만나면 화폭에 예상하거나 기대하
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. 영국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
의 말처럼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문득 그림 그 자체와는 상관
없이 바깥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저러한 형태들과 방
향들이 어찌어찌하여 그냥 나타나는 것이다. 그림책을 본다는
것은 글로 쓰여진 개념이나 대상을 넘어 미지의 영역과 서로
맞닿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